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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itsugu E. 카르테의 첫 번째 칸에 물 흐르듯 매끄러운 활자체로 써진 이름 위에 코토미네는 손을 올렸다. 일본계 미국인, 에미야 키리츠구. FBI의 프로파일러 수사관. 코토미네는 미리 들어 기억하고 있는 그의 약력을 머릿속에서 되새겼다. 약관의 나이에 FBI 훈련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고 FBI의 행동과학부에서 프로파일러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젊은 수사관. 대중매체에서 떠들썩하게 떠들어대던 연쇄 살인범들 체포하는데 수많은 기여를 했지만 현재는 일선에서 물러나 FBI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코토미네는 그를 자신에게 소개한 BAU 국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떤 연쇄 살인범을 추적하다가 보복으로 아내를 잃었다고. 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도 친권 싸움에서 패배해 아내의 집안에 보내야 했다고. 아내를 죽인 범인은 결국 체포해서 감옥으로 보냈지만 현행법을 생각해보면 그 범인에게 법의 단죄가 내려질 날은 까마득히 멀었다. 결국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일선에서 물러나 강의를 맡았지만, 프로파일러로서 그의 능력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은 BAU 상층부에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FBI 소속의 상담의를 놔두고 환자를 까다롭게 가려서 받는 코토미네에게 소개가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료실의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에게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코토미네는 팔꿈치로 그가 앉아 있는 가죽 의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괴었다.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남자의 까만 눈은 텅 비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초점이 안정되지 않는 눈, 초췌하게 야윈 뺨, 손질하지 않아 덥수룩한 까만 머리카락과 실내에서도 벗지 않는 낡은 코트와 그 안에 입은 후줄근한 정장. 느슨하게 맨 넥타이와 칠판에 판서를 하는 것을 오른손 손가락의 분필 흔적. 반질하게 닳아있는 소매. 최소한의 생활환경만 간신히 유지하고 살아가는 남자의 전형적인 표본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코토미네는 그런 남자의 침묵이 전략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다.
프로파일러들은 곧 훌륭한 정신과 상담의이기도 하다. 보통 평범한 상담의들이 사용하는 전략을 그들은 전부 다 파악하고 있고, 그에 대한 대응법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BAU에서 가장 골치 아파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정신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BAU의 국장이 어떻게든 현장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싶어 할 정도의 프로파일러가 정신과 의사를 상대로 쉽게 제 속내를 털어놓을 리 없다. 상담의 필요성과 그 효과는 이해하고 있겠지만, 본인에게 BAU로의 복귀 의사가 없다면 상담에 응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남자의 침묵에 코토미네 역시 침묵으로 대응했다. 까다로운 환자라면 지금까지도 몇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대하는 것에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코토미네는 잘 알고 있었다. 심플하지만 세련된 모던 풍의 상담실 안에는 희미하게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이 흘렀다.
1시간으로 정해진 상담시간이 종료되었을 때까지 결국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다. 상담 종료를 알리는 알림이 울리자 남자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코토미네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낡은 코트 자락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다음에는 그 코트를 벗는 것부터 해볼까요?”
그대로 진료실을 나서려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내내 공허하던 눈에 처음으로 초점이 돌아오며 코토미네를 보았다.
“상담은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끝났습니다. 이건 다음 상담을 위한 사전 조율입니다.”
코토미네는 빙긋 남자를 향해 웃어보였다.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쓱 몸을 돌렸다. 코토미네는 그 등을 향해 말을 건넸다.
“다음 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방문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토미네는 그가 닫고 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 아래에 놓아둔 카르테에 시선을 주었다. 나눈 말이 없으니 쓸 수 있는 것도 없다. 코토미네는 카르테를 덮어 탁자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다음 상담의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방문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코토미네는 양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맞대었다. 검지와 검지를 톡톡 부딪치며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앞에 앉아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침묵을 전략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FBI 프로파일러. 흥미로운 상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코토미네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 남자의 안에 깔려 있는 텅 빈 공동이었다.
침묵 아래에서 그들은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코토미네가 남자 안의 공허를 감지했듯이 그 역시 코토미네에게서 무엇을 느꼈을 가능성이 컸다. 코토미네는 가지런히 모은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빙긋 미소 지었다.
***
BAU 국장의 설명을 들으며 코토미네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짙은 쇠의 비린내와 고기가 썩는 냄새가 그의 민감한 후각을 괴롭혔다. 방수포로 덮어놓은 시신을 감식반이 들것에 실어 들고 나갔다. 손등으로 가볍게 입가를 덮는 그에게 주위 수사관들의 연민과 비웃음이 섞인 시선이 닿았다. 고급스런 정장을 차려입고 편한 사무실에 앉아서 말 몇 마디 해주는 것으로 돈을 버는 네가 뭘 하겠냐는 시선이었다.
코토미네는 그런 그들의 시선을 모른 척 외면했다. 그가 굳이 번거로움을 감내하고 여기까지 발길을 옮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코토미네는 지루함과 불쾌함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별로 의미가 없는 국장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무의미한 소음에 가까운 국장의 말을 잘랐다. 코토미네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상복 같은 검은 정장을 후줄근하게 차려입고 코트를 걸친, 에미야 키리츠구가 그곳에 서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퀭하게 야윈 뺨, 생기 없는 눈동자. 전에 봤을 때와 똑같았다.
국장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에미야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시신이 있던 장소로 다가섰다. 코토미네는 한 걸음 물러서 그에게 조금 더 공간을 내어주었다. 코토미네에게 아주 잠시 시선을 주었던 에미야는 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바닥을 보았다. 메마른 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코트 아래의 어깨가 바짝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이마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코토미네는 주위 수사관들이 그에게 존경과 경멸, 질시, 공포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복잡한 시선을 주는 것을 눈치 챘다. 그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의심하고, 질시하는 인간다운 시선. 코토미네는 입가를 덮은 손바닥 아래에서 미소를 지었다.
차게 식어 가늘게 경련하는 손으로 눈가를 짚은 에미야가 쥐어짜내듯 목소리를 토해냈다.
“범인은…….”
시신조차 보지 못했을 그가 시체가 어떤 형태로 놓였었는지, 어떤 식으로 살해당했을지, 범인이 어떤 짓을 피해자에게 했는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그에게 질린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그를 이 자리로 불러낸 BAU의 국장은 흡족해하면서도 약간 경계하듯 그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코토미네는 눈을 부릅뜨고, 희열에 몸을 떨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열기가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코토미네는 아슬아슬하게 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탄식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애써 흐트러질 것 같은 표정을 수습했다. 여기서 의심의 꼬투리를 제공할 수는 없다.
봇물처럼 말을 쏟아내던 에미야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계속해서 떨리고 있던 그의 무릎이 결국 휘청 꺾였다. 코토미네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빠르게 다가가 무너지는 에미야의 몸을 받아 안았다. 추운 것처럼 덜덜 떨리는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뜨겁게 열을 내고 있었다. 코토미네는 그를 품에 안은 채 국장을 돌아보았다.
“쉬게 해주는 게 좋겠습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시지요?”
설령 있다고 해도 이런 상태의 그에게 뭔가 더 요구하면 그땐 너는 인간도 아니다. 코토미네는 그런 표정으로 국장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국장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딘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코토미네는 에미야의 무릎 아래쪽에 팔을 넣어 그 몸을 훌쩍 들어올렸다. 스스로 설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은 에미야의 손이 코토미네의 가슴팍을 매달리듯 움켜쥐었다. 이미 의식을 거의 잃은 것처럼 보이는 에미야의 입술에서 가늘게,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리……. 이리야…….”
죽은 아내와 만날 수 없게 된 딸의 이름이다. 현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차로 향하며 코토미네는 애절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땀으로 축축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시켜 놓은 차의 조수석에 코토미네는 에미야의 몸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아직 가늘게 경련하는 몸을 뒷좌석에 싫어둔 담요로 감싸고, 트렁크의 아이스박스에서 생수를 꺼내왔다.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매는 것 같은 그를 내려다보며 코토미네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에미야의 목을 받쳐 들고 입술을 겹쳤다. 메마른 입술을 혀로 비집고 열고 들어가 뜨거운 혓바닥을 눌렀다. 목구멍 안쪽으로 천천히 물을 조금씩 흘려보내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에미야의 마른 목덜미가 경련하며 꿀꺽 물을 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코토미네는 한 번 더 같은 방식으로 물을 마시게 했다. 입술을 떼어내고 잠시 기다리자 몽롱하게 허공을 헤매던 눈에 초점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코토미네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들었습니까?”
물로 젖은 입술이 아주 작게 달싹였다. 코토미네. 소리 없이 이름을 부르는 그에게 코토미네는 잘했다는 듯 웃어보였다.
“병원에 가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다니는 곳이 있습니까?”
코토미네의 말에 에미야가 고개를 저었다. 작지만 확실한 거절. 병원에 대한 공포마저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병원은, 싫어.”
꺼질 것 같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토해낸 거부의 말에 코토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아내의 시신을 병원의 영안실에서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병원 자체에 대한 거부반응이 생겨도 이상할 것은 없다. 코토미네는 에미야의 이마를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 차에서 조금 쉬도록 하세요.”
코토미네의 말에 에미야는 긴장이 풀린 듯 몸에서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축축하게 젖은 야윈 뺨을, 코토미네는 손바닥으로 한 번 쓰다듬었다. 타인의 흔적으로 젖은 손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묻은 액체에 혀를 가져다 대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코토미네는 에미야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메마른 손목의 얇은 거죽 아래에서 약간 빠르게 맥박이 뛰었다. 그 손목에 이를 세우고 싶을 것을 참으며 코토미네는 땀으로 젖은 에미야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쓸어 넘겨주었다. 야윈 뺨을 훑고 내려온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목덜미에 닿았다. 근육이 도드라진 목의 선을 따라 훑으며 코토미네는 속삭였다.
“드디어 찾았다.”
***
새가 우지기는 소리에 에미야는 눈을 떴다. 푹신한 담요에 감싸 안겨 차의 조수석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 안에는 그 한 사람 뿐이었다. 에미야는 의식을 잃기 직전, 자신의 정신과 담당의가 된 코토미네가 곁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조수석의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공원? 에미야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분명 현장에서 쓰러졌는데, 어째서 공원에 와 있는 걸까. 에미야는 손을 뻗어 조수석의 손잡이를 쥐었다. 문을 열자 약간 선뜩한 공기가 파고들어와 그는 몸을 덮은 담요를 조금 더 여몄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자 조금 떨어진 곳의 야외 테이블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코토미네가 보였다. 에미야는 약간 망설이다 그에게로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섰다.
테이블에 하얀 천을 깔고 일회용의 접시와 식기를 늘어놓고 있던 코토미네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근엄한 신부와도 닮은 얼굴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깼습니까?”
“여긴…….”
“가까이에 마침 공원이 있더군요. 사람도 적고 그래서 당신이 쉬기에는 좋을 것 같아 이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병원은 싫다고 하셔서.”
무의식중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고 에미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의 준비를 마친 코토미네가 다가와 그를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상냥하지만 단단한 손에 붙잡혀 에미야는 의자에 앉았다.
“전에 만났을 때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지내는 것 같아서 약간 신경이 쓰였었습니다. 사실은 이런 식으로 대접할 생각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코토미네는 밀폐 용기에 담겨있는 음식을 에미야의 앞에 있는 접시에 덜어주었다. 구운 야채와 다진 고기에 두부를 섞어 부드럽게 만든 한입 크기의 햄버거. 아직 싱싱한 푸른 야채에는 발사믹 식초를 섞은 올리브 오일을 뿌렸다. 그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식탁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에미야는 곁에 선 코토미네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왜 이렇게까지 해주냐고 묻는 그의 표정에 코토미네가 빙긋 웃었다. 그는 몸을 굽혀 의자에 앉아있는 에미야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아직 온기가 돌아오지 않아 차가운 그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저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이해받고 싶고요.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흥미로운 피험체라서 그렇습니까?”
경계선을 긋는 것 같은 그 말에 코토미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학자로서 당신이 흥미로운 환자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저는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코토미네는 에미야의 손등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린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손을 식탁 위에 놓아둔 식기 쪽으로 이끌었다.
“그 이야기는 앞으로 천천히 해가도록 하지요.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고기’가 입에 맞으면 좋겠군요.”
약간의 경계와 불신으로 코토미네를 바라보던 에미야가 망설이며 손을 움직였다. 관절이 도드라진 그 마른 손가락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햄버거를 하나 집어 들었다. 에미야는 한입 크기로 섬세하게 빚어낸 햄버거를 입에 넣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지만 식사를 잘 하지 않는 그를 배려한 듯 씹는 맛은 부드러웠고, 간은 최소한으로만 되어 있었다. 에미야는 입 안에 넣은 고깃덩어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씹었다. 마른 목구멍 안쪽으로 스며드는 육즙은 독처럼 달콤했다.
괴물의 과거
코토미네는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에 등 근육이 절로 이완되었으나 팔 주변의 근육들은 굳어서 묵직했다. 다른 이의 머리통이 제 팔을 베고 있음이라.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헐벗은 가슴께가 살짝 간지러웠는데, 숨소리가 품 안에서 들려왔다. 다른 이와 함께 침상에 드는 건 아내가 죽은 후로 한 번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가물가물하던 정신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마냥 현실로 돌아왔다. 감정적 동요가 몸에는 반영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대가 깨어난 기색이 없었다. 코토미네는 눈만 슬쩍 떠서는 제 팔을 베고 자는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남자. 20대 후반. 제가 알지 못하는 상대였다.
코토미네는 베개에서 머리만 살짝 든 채로 눈만 도록도록 굴려서는 상태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둘 다 알몸으로 한 이불을 덮은 채로 일본식으로 추정되는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뜻밖에 옷가지는 꽤 차곡차곡 접혀서 이부자리 옆에 놓여있었는데 코토미네는 제 옷이 접힌 모양을 보고서 자신의 의지로 탈의했다는 걸 알았다. 알몸이 고스란히 서로의 몸에 닿고 있었는데, 잠든이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숨소리를 통해 깊이 잠든 걸 확인한 코토미네는 한 팔을 내어준 채로 주변상황과 상대를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이불을 살짝 들자, 드러난 남자의 몸은 엉망이었다. 온몸에 키스자국이 덕지덕지 있었고, 유두와 배 부분에는 치아모양이 나 있었는데 피가 보일정도로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목에는 커다란 제 손자국이, 허벅지와 다리에 눈이 들어오자, 코토미네는 눈에 띄게 당황했는데 아래가 정액투성이인 데다 발목에 손자국이 크게 남아 있었다. 합의적인 성관계라기보다는 아무리 봐도 강간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무방비하게 잠들어있는 상대는 아무리 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코토미네는 차라리 자신이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버려져있거나 겨울 숲에서 곰과 함께 깨어났어도 이렇게나 놀랍지는 않을거라 생각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코토미네는 과거 기억을 열심히 파헤쳐봤지만, 분명히 어젯밤에 이탈리아의 집에서 아내의 마지막 유품들을 정리하고 잔 게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비뚤어졌어도 신부라는 자가 모르는 남성과 알지도 못하는 장소에서 알몸으로 깨어나다니. 자괴감보다 혐오가 앞섰다. 제가 아무리 정신적으로 몰려 있음에도 이런 기행을 벌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상대가 마술이나 약물을 써서 조종했을 거라는 생각에 제 몸을 점검하던 그는 예전에 비해 살짝 길어진 머리카락과 가슴에 흉하게 생긴 상처를 발견했다. 즉사에 가까울 총상이 난 부분을 손으로 더듬던 그는 여러 번 가슴께를 만져보고서야 제 심장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비명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코토미네는 제 가슴 부분을 더듬다가 남자가 졸음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그래?"
"심......심장이 없어서?"
그 말에 상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코토미네를 보던 남자는 고개를 잠시 흔들더니만 다시 누워서는 코토미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코가 상대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남자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심장을 통해 지나가는 혈류의 소리를 예민한 감각을 가진 코토미네가 집중해서 듣기 시작하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계속해서 울리는 심장소리를 듣고 있자 코토미네는 곧 차분해졌다. 코토미네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참동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코토미네는 오늘자 신문으로 자신이 30살임을 알았다. 25살이었던 그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본다면 5년이 어디로 증발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일들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코토미네는 눈 앞의 상대에게 5년 동안의 기억을 잃었다고 말하자, 남자는 농담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코토미네가 진지하게 이름을 묻자 해괴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코토미네를 바라보던 그는 에미야 키리츠구라고 밝혔다. 에미야 키리츠구. 에미야 키리츠구. 염불마냥 이름을 외던 코토미네가 키리츠구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어제 내가 당신과 잔 건가?”
“......그래.”
정신상태가 의심된다는듯한 얼굴표정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상대의 행동에 짜증이 일었지만, 호기심이 먼저였다. 키레는 이 남자와 자신이 무슨 관계인지가 제일 궁금했다.
“이유가 있었나? 너와 나는 어떤 관계지? 협력자인가?”
“......뭐, 비슷해. 너는 내가 살아있는걸 원했고, 나는 마력이 필요하거든. 내 몸은 저주로 인해 마력 고갈이 심해서, 네 정을 통해 마력을 공급받고 있지.”
코토미네는 자신이 마력을 넘겨주기 위해 상대와 동침했다는 것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내의 간병을 위해서 배웠던 치유마술은 아내의 사망 후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나 마력만은 존재했다. 필요를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면 납득은 할 수 있었다. 코토미네가 키리츠구를 가만히 바라보았으나, 그 이상 설명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코토미네는 제 심장부근에 손을 올리다 키리츠구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어떻게 심장을 잃었는지 알고 있나?”
그 질문만은 에미야 키리츠구는 대답하지 않고 씻으러 가버렸다. 코토미네는 에미야 키리츠구의 헐벗은 뒷모습을 보면서 왜 계속해서 저 남자를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미야 가의 화장실 거울에서 어깨에 닿을 정도로 자란 머리카락과 제 모습들을 넋 나간듯이 쳐다보던 코토미네는 우선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인 코토미네 리세이에게 개인회선으로 연락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는 걸 알고 성당교회를 통해 직접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했다. 코토미네 리세이는 4차 성배전쟁 중에 후유키 시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의 전화를 멍하니 들으면서 전화선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이미 3년째였다. 제 기억으로는 아내는 30일 전에 죽었다. 사흘 전에 제 손으로 수녀원에 맡긴 아이에 대해 문득 질문하려다가 손 아래에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직전인 전화기를 알아차리고는 그냥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의 교구를 그대로 이어받아 배정받은 교회가 있다는 마지막 설명을 떠올리다가 인상을 썼다. 배정받은 곳은 시의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의 성당교회였는데, 평일에도 신자가 있었다. 모두 다 코토미네 키레이 신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코토미네는 약간 현실에서 붕 뜬 느낌을 느끼며 하루를 보냈고, 어떤 정신으로 미사를 해치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성당 뒤에 안치된 무덤에서 코토미네 리세이의 이름을 단 묘비를 손으로 한번 쓰다듬었다. 코토미네에게 남은 이름은 에미야 키리츠구뿐이었다. 그는 다시 에미야 가로 돌아왔다.
“내가 성배전쟁에서 어쌔신의 마스터였고, 세이버의 마스터인 너에게 패배했다는 건가?”
“그래.”
“네게서 심장을 잃은 나는 성배의 진흙에 의해 살아났고, 나는 너의 괴롭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기 위해 원수에게 계속해서 마력을 공급하고 있었다는 건가?”
“네가 그렇게 말했어.”
“......그럴 리 없다. 에미야 키리츠구!”
코토미네는 키리츠구의 아들이라는 시로가 준 전병을 씹어 먹으면서 TV를 바라보았다. 차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숙제를 하던 아이가 자러간 이후부터 쭉 뉴스를 틀어주던 채널은 이제 새로 출시한 자동차 광고를 보여주고 있었다. 에미야 키리츠구는 코토미네가 5년 동안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았어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부모가 직접 자수를 놓아서 만들어야 한다는 아이용 손수건을 끙끙거리면서 바늘로 찔러대던 키리츠구가 실을 바꾸면서 말했다.
“뭐가 말이야?”
코토미네는 키리츠구의 손가락에 걸리는 색실보다는 벌어진 유카타 자락 안쪽의 어두운 그림자와 단단한 목선에 가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숨기려고 했지만 어투는 약간 날이 서 있었다.
“내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즐거워한다는 거냐?”
“그래.”
에미야 키리츠구는 실을 다시 꿰느라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 말에 긍정했고 코토미네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표정으로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멍하니 키리츠구를 바라보았다.
“그런 행동은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짓이다! 타인의 고통을 기쁨으로 여기다니! 어느 사악한 외도라도 용서받지 못하는 짓을 내가 할 리 없어!”
키리츠구는 손수건을 내려놓은 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코토미네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다가 키리츠구는 피식 웃고 다시 바늘을 잡았는데, 벌써 여섯번째로 손가락을 찌른 키리츠구가 핏방울이 올라온 손가락을 입 안에 넣고 있다가 잠시 후에야 말했다. 정말 기억을 잃었군. 뭉개진 발음으로 말한 그가 덧붙였다.
“25살의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서른 살의 나는 다른가?“
키리츠구가 손수건을 잡은 채로 작게 하하 웃었다. 코토미네는 키리츠구가 자신과의 대화에서 가볍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는데, 거의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키리츠구가 말을 해서야 제 시선을 깨닫고 시선을 살짝 내렸다. 목에 남은 손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폭력의 잔재였다.
“지금의 너는 귀여울 정도야. 젊은 신부님.”
그 말의 끝자락에 담긴 미소는 아내를 닮아 있었다. 핏자국이 선명하다. 코토미네는 9번째로 바늘에 찔린 키리츠구를 보다가 다가가서는 핏방울이 송글송글 올라온 손을 잡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그대로 치유마술을 영창했다. 곧 빛과 함께 손가락은 물론이고 계속해서 거슬렸던 목에 남아있던 희미한 손자국과 옷자락 사이에 보이던 정사의 자국들마저도 사라졌다.
“......고마워.”
그제야 코토미네는 에미야 키리츠구의 목이 쉬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서른 살의 자신은 저 남자의 옷을 벗기고, 유두를 짓씹으며, 팔목과 발목을 강제로 잡은 채로, 강압적으로 정을 퍼부으면서 목선이 두드러지는 저 목을 두 손으로 짓누른걸까. 키리츠구가 담담하게 말하면서 다시 손가락 고문도구인 손수건을 쥐자. 갑자기 기저모를 짜증과 분노, 한심함 따위가 발끝에서부터 목 끝까지 차올랐다.
코토미네 키레이가 남을 괴롭히면서 쾌락을 얻을 리 없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은 이미 조치를 취했을 터였다. 이 남자가 말한대로라면 서른 살의 코토미네 키레이는 자신이 가장 우려하는 인물로, 원수인 동성과의 강압적인 성관계를 가지며,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미치광이일 뿐이었다.
코토미네는 키리츠구와 접촉했을 때, 성직자답게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했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깨끗해진 목 위로 새 손자국을 만들고 싶어졌다. 이 제대로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을 조르고 눈물과 신음을 듣고 싶었다. 마력을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저 몸에 제 좋을 대로 정을 퍼붓고 싶었다.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분명히 이 에미야 키리츠구라는 사내는 안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상대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알지도 못했던 가학성이 마음 한 구석을 긁어댔다. 코토미네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에미야 키리츠구의 곁에 가까이 있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설사 이 남자의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코토미네는 괴물이 되어버린 어리석은 자신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코토미네는 목깃으로 가는 시선을 돌리며 식은 찻잔을 잡았다.
멋진 작품으로 참여해 주신 너드님, 가오리님, 아노니머스님, 문워커님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